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다.
평범한데 이상하고 불안하다.

현실을 보여주는데도 현실 같지 않다. 특별한 판타지가 등장하는 것도 아닌데, 익숙한 일상이 아주 조금씩 비틀리면서 어느 순간 현실의 감각이 무너진다.
<어쩔수가 없다>는 그 감각이 가장 자연스럽게 완성된 작품처럼 느껴졌다. 장면 하나하나를 감상하는 영화이면서도, 이번에는 미장센에 감탄하기보다 이야기 속으로 깊이 빨려 들어갔다.

영화를 보는 내내 가장 먼저 떠오른 말은 ‘짜임새 있다’였다.
모든 장면이 계산되어 있다는 느낌은 분명한데, 그것을 과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일상적이라 방심하게 만든다.
그런데 그 평범한 공간 안에서 아주 작은 균열이 생긴다.
이게 현실이 맞나?
그 질문이 반복되는 순간, 영화는 현실과 악몽의 경계 어딘가로 관객을 데려간다.
Scene #01.
‘모가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순간

가장 씁쓸했던 장면이다.
해고를 앞두고 혼자 수없이 말을 연습한다.
하지만 정작 상대 앞에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그리고 너무도 허무하게 버려진다.
분노는 준비할 수 있지만 현실은 준비한 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영화는 거창한 대사 대신 그 침묵으로 해고라는 폭력을 보여준다.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장면이었다.
Scene #02.
면접장의 창문에서 계속 들어오던 빛

면접 장면에서는 이상하게 창밖에서 반사되는 빛이 계속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단순한 연출인가 싶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가 된다.
마치 면접을 보는 인물처럼 관객도 끝내 편안해질 수 없다.
빛 하나만으로 불안감을 만드는 방식.
이런 연출이야말로 박찬욱 감독이 가진 섬세함이라고 느꼈다.
Scene #03.
웃음과 긴장이 동시에 존재했던 고추잠자리

이 장면은 단연 압권이었다.
설명하지 않아도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쉽게 잊지 못할 것이다.
웃음이 먼저 나오는데, 이상하게 웃고 나면 더 불안해진다.
<어쩔수가 없다>는 이런 감정을 정말 능숙하게 다룬다.
웃음과 공포가 아주 가까운 감정이라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한다.
Scene #04.
마치 무대 위 연극 같았던 부부의 대화

댄스파티 이후 이어지는 부부의 장면도 오래 남는다.
현실적인 대화인데도 어딘가 연극을 보는 듯한 거리감이 있다.
인물들이 감정을 직접 터뜨리기보다 서로의 호흡과 공간이 먼저 말을 한다.
그래서 더욱 묘하다.
현실인데 현실 같지 않은 감각.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분위기가 이 장면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Scene #05.
범죄자가 되어 가는 마음

실탄 하나를 현장에 두고 왔다. 정확히는 놓치고 왔다.
현장에서 들려오는 경찰의 한마디 때문에 인물은 스스로를 더욱 치밀하게 몰아붙인다.
사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람의 심리가 어떻게 변하는가 하는 점이었다.
영화는 거대한 악인을 그리기보다 평범한 사람이 상황 속에서 얼마나 쉽게 달라질 수 있는지를 조용히 바라본다.
박찬욱 감독이 <헤어질 결심> 이후 더욱
적극적으로 일상 속 낯섦을 밀어붙이고
있다는 인상을 받았다.

갑작스러운 줌인처럼 평범한 장면의 리듬을 깨뜨리는 순간들이 있다.
특별한 사건 때문이 아니라 카메라가 현실의 균형을 살짝 비틀면서 관객의 감각을 흔든다.
그래서 평범한 공간조차 끝까지 안심할 수 없게 된다.
이병헌이 보여준 가장 무거운 얼굴

이번 작품에서 가장 신선했던 것은 이병헌의 표정이었다.
평소 강한 카리스마를 보여주던 모습과 달리, 이번에는 마치 중력에 눌린 사람처럼 보인다.
무기력함, 체념, 불안..
그 감정들이 얼굴에 층층이 쌓여 있다.
화려한 감정 연기보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표정이 훨씬 오래 남는다.
더 이상의 사람이 필요 없는 시대가
도래한다면 인원 감축되어
돼지마냥 도축되겠지.

영화를 보면서 가장 많이 떠올랐던 생각은 이것이었다.
더 이상 사람이 필요 없는 시대가 온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효율이라는 이름 아래 사람은 쉽게 숫자가 되고, 필요 없어진 존재는 너무 쉽게 밀려난다.
영화는 거창한 사회 비판을 외치지 않는다.
그저 한 사람의 불안을 따라가게 만들 뿐이다.
그래서 오히려 더 현실적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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